1912년 총독관저 일대 행사사진

사진의 출처


이번에 발굴된 사진들(14매)은 사진첩 『광희의 역사』(서울중부교육지원청 소장자료)에 수록된 ‘테라우치 총독 조선인 관공립(官公立) 보통학교 생도 접견 행사(1912.5.25일 촬영)’에 관한 것이다. 이 사진첩의 구성 형태를 살펴보면 몇몇 사진의 뒷장에 다른 사진첩에 부착되어 있던 것을 뜯어낸 흔 적이 역력하므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꾸려진 사진첩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광희초등학교 쪽에서 보관 관리하고 있던 각종 사진첩 또는 개별 사진자료 들을 취합하여 해방 이후의 시점에서 이를 임의제본물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인 듯 하다. 이러한 탓에 ‘테라우치 총독 조선인 보통학교 생도 접견 행사’ 관련 사진들은 이 사진첩의 맨 앞쪽에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사진첩 『광희의 역사』를 새로 꾸 미는 과정에서 원래의 순서가 크게 흐트러진 상태로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의 원소장처는 광희초등학교이며, 이 행사가 벌어진 1912년 당시의 명칭으로는 ‘인현공립보통학교(仁峴公立普通學校)[1]였다.




[1] 학교 위치는 인현동 2가 14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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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적 가치


‘테라우치 총독 조선인 관공립 보통학교 생도 접견 행사(1912.5.25)’는 이제껏 이러한 행사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이 행사에 관한 묶음사진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근대교육사의 정리에 있어서 희소성이 높고 주목할 만한 소중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특히, 통감관저로 입장하는 조선인 학동들을 대상으로 국기(國旗)[2] 한 자루와 과자 한 봉지씩을 나눠 주는 등 식민통치자들이 선심(善心)을 베푸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 것은 식민지 교육의 실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증거자료의 하나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애뉴얼 리포트(Annual Report)』(1911~1912년판)에 “일본인 소학교 학생” 접견 당시 테라우치 총독이 경무총감부 앞 광장에서 훈시를 행하고 있는 장면(1912.5.12일 촬영)을 담은 사진자료[3] 하나가 유일하게 소개된 것이 전부이다. 『애뉴얼 리포트』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에 관한 정보를 담아 서양 각국을 대상으로 하여 해마다 제작 배포하는 영문판 홍보책자이며, 이 판형의 정식 제목은 『Annual Report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Korea) (1911~1912)』(1912년 12월 발행)으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인 관공립 보통학교 생도 접견 행사를 담은 일련의 사진자료들에는 총독관저 정문(總督官邸 正門)으로 입장하여 관저 후면의 녹천정(綠泉亭)과 호도원(好道 園)을 거치고 다시 보륭교(寶隆橋)[4]를 지나 경무총감부 광장(警務總監部 廣場)[5]으로 넘어가는 행로가 두루 포착되어 있다. 지금껏 총독관저는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상대 적으로 그 주변의 공간을 담은 사진자료는 그다지 풍부하게 남아 있지는 못한 편이 었는데, 이와 같은 다양한 사진자료가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총독관저 구역의 공간 배치현황을 재구성할 수 있는 마침맞은 근거자료로 활용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참고] '녹천정(綠泉亭)’이라고 하는 정자는 원래 오서 박영원(梧墅 朴永元, 1791~1854)이 세운 것인데, 1885년 이후 이곳에 일본공사관이 들어서고 다시 1906년 통감관저로 변한 이후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 이곳을 재건하여 사용했던 공간이다. 특히,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통감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하나[6]를 남겼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내용은 “南山脚下綠泉亭(남산 발 아래 녹천정에서)/ 三載星霜夢裡經(삼년 세월 을 꿈속에 지냈네)/ 心緖人間隨境變(마음이란 곳에 따라 변하는 것이)/ 別時閑看岫雲靑(때로는 한가롭 게 구름도 쳐다보네)/ 己酉 七月 十有四日 將辭京城 援筆自題 春畝山人(기유년 7월 14일에 장차 경성 을 떠나려 하매 붓을 잡고 스스로 짓다. 춘무산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일장기
[3] 
『애뉴얼 리포트 (1911~1912년판)』(민족문제연 구소 소장자료)에 수록된 경성소 재 일본인 소학교 생도들의 접견 및 야유회 행사를 마무리 하면서 경무총감부 앞뜰에 모여든 이들 앞에서 훈시를 행하고 있는 테라 우치 총독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 료(1912년 5월 12일 촬영)이다.

[4] 나무다리
[5]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6] 
『경성부사(京城府 史)』 제2권(1936)에 수록된 이토 히로부미의 이른바 ‘녹천정의 자작시’(오른쪽)와 이에 대한 테라우치 총독의 감상문(왼쪽)이다. 이토의 칠언절구 자작시는 그가 한국 통감에서 물러나던 때인 1909년 7월 14일에 지었고, 테라우치의 글은 1916년 7월 1일에 작성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