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중부기록

소풍은 주로 봄, 가을에 이루어졌습니다. 정규 교육과정 속에 근대적인 개념의 ‘소풍’이 포함된 것은 개화기 이후부터입니다. 소풍은 심신의 단련을 중심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감상하며, 역사문화유적이나 시설 등을 견학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멀리 걸어서 간다’는 뜻을 담은 ‘원족(遠足)’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에는 당일 다녀오는 여행인 원족과 수학(修學)을 목적으로 1박 이상 여행하는 수학여행으로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월간 중부기록」 4월의 주제는 소풍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소풍 현장의 변천사를 중부학교기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소장기록 한 장면

배화여고보 경주 수학여행 사진
1932년 배화여고보 경주 수학여행 사진

이 기록은 1932년 배화여고보 학생들이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서 촬영한 사진기록입니다. 학생들이 첨성대에 매달려서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첨성대는 경주에 소재한 천문지리기구로서, 1962년에 국보 제31호로 지정된 구조물입니다. 지금은 강력하게 보호조치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누구든 쉽게 접근하고 매달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화여고보 백년사>에는 1930년대 내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지금과 같은 구도의 사진을 이어 촬영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배화여고보는 수학여행을 봄, 가을 중에 연 1회 실시하였고, 선박이나 기차를 이용해 경주뿐 아니라 금강산, 평양 등지로도 다녀왔습니다.

| 일제강점기의 소풍과 수학여행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처음에는 소풍이나 수학여행 등을 금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각 도장관에게 보낸 문서에는 ‘숙박을 요하는 수학여행을 하지 말 것.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도장관(도지사)에게 허가를 받을 것’ 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 학생들이 한꺼번에 함게 수학여행을 하면 애국심을 높일 수 있다고 걱정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수학여행이 늘어났습니다. 일본의 ‘문화통치’ 기조에 따른 것인데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의 발언에서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인문들을 많이 얻는 데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실제로 1920년부터는 수학여행이 급증하게 됩니다. 목적지는 기본적으로는 경성, 평양, 개성, 경주, 수원, 부여, 강화를 축으로 하는 역사유적지가 가장 많았지만, 인천, 진남포, 신의주, 원산 등 공업시설이 많은 곳과 배를 타고 일본까지도 단골 수학여행지로 등극했습니다. 수학여행이 일본의 근대화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나 근로봉사를 겸한 황민화정책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천에서는 정박 중인 일본군함에 승선해서 관람하는 코스가 있었고, 영등포에는 일제가 건설한 간이비행장을 돌아보는 코스가 있었습니다.

동성고 일본 수학여행 사진 요코하마 항구에서
1936년 수학여행을 위해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한 동성고 학생들
일본으로 소풍간 학생들이 왕궁 앞에서 찍은 사진
일본으로 소풍 간 학생들이 왕궁 앞에서 찍은 사진
1934년 배화여고보 영등포 비행장 견학
1934년 영등포 비행장으로 소풍 간 배화여고보 학생들

| 전쟁 중에도 떠난 수학여행

6.25 전쟁 당시에도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모든 것이 여의치 않고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학교생활을 활발히 이어나간 것입니다. 피난지 부산에 세워졌던 피난학교에서도 매년 봄과 가을에는 경북 일대의 명승지를 찾아 소풍을 갔습니다. 숙명여자고등학교는 피난학교가 있던 부산에서 경주까지 트럭을 타고 수학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숙명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경주 수학여행 사진
1953년 부산에서 경주까지 트럭 타고 수학여행 간 숙명여자고등학교 학생들
숙명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경주 수학여행 사진
숙명여자고등학교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 소풍은 걸어서 가야 맛이지!

1970년,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서울근교 소풍장소 20개소’를 선정했습니다. 전국 각지로 오가던 소풍을 되도록 ‘걸어서 가는 곳’으로 택하도록 각급 학교에 지시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당시 서울시교육위가 1일 1만보 걷기운동을 추진하면서 가까운 곳은 버스나 기차 말고 걸어서 가도록 권장하고 있었던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1970년부터 조직된 육성회가 당국이 지정한 것 외의 잡부금을 일체 걷지 못하도록 방침을 세웠는데요. 그래서 소풍을 간다고 교통비를 따로 더 걷거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적은 돈이라도 교통비가 없는 학생들이 교통비 부담 없이 소풍을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지도로 보는 1970년대 소풍 추천지

1933년 경기여고 창경궁 식물원 견학 사진
경기여자고등학교 창경궁 식물원 견학 사진
경기여자고등학교 북한산성 소풍 사진
경기여자고등학교 북한산성 소풍 사진
경기여자고등학교 소요산 산행 사진
경기여자고등학교 소요산 산행 사진

1970년대 학년별 소풍 추천장소

| 소풍 3대 놀이 - 수건돌리기, 보물찾기, 장기자랑

즐거운 가을 소풍 날 [출처: 울산MBC]

소풍을 가면 수건돌리기, 보물찾기, 장기자랑 이 세 가지 놀이를 하는 것은 ‘국룰’이었습니다.

수건돌리기는 소풍에서 가장 흔하게 하던 놀이입니다. 다 같이 돌라앉아 노래를 부르는 동안 술래가 수건을 들고 원 바깥을 돌다가 몰래 누군가의 자리에 놓아두는 놀이입니다. 술래가 한 바퀴를 다 돌 때까지 자기 자리 뒤에 수건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 사람이 술래가 되어 이 행위를 반복합니다.

보물찾기는 소풍현장 구석구석에다 선생님들이 미리 보물이 적힌 쪽지를 숨겨 놓으면 아이들이 흩어져 정해진 시간 내에 그 쪽지를 찾는 놀이입니다. 쪽지에 적인 보물들은 과자 종합선물세트나 공책, 크레파스, 색연필 등 학용품들이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 가운데 활발하고 끼 많은 아이들이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장기자랑 대회가 한판 돌고 나면 즐거운 소풍의 하루가 슬슬 마무리됩니다.

수건돌리기
수건돌리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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