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중부기록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준비한 「월간 중부기록」 주제는 ‘전쟁과 학교’입니다. 중부학교기록을 통해 피난지 부산에 개설된 피난학교의 모습과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어떠하였는지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또한 당시 고등학교를 다녔던 두 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구술영상기록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구술 참여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피난학교 학생의 삶을 살았던 ‘경기중학교 학생’ 이규항님과 중학교 재학 중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채 군인의 삶을 살았던 ‘용산중학교 학생’ 박경선님입니다.

두 학생이 직접 들려주는 전쟁의 경험, 피난학교에서의 일화를 통해 전쟁과 학교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소장기록 한 장면

경기고 화동 교사의 총탄 자국
경기고 화동 교사의 총탄 자국

1953년 6.25전쟁 당시 경기고등학교 화동 교사의 모습입니다. 학교 건물에 새겨진 수많은 총탄 자국이 전쟁의 참상을 보여줍니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서울의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기고등학교는 피난지 부산에서 피난학교를 개설하고 수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경기고 학생들은 곧바로 학교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학교 건물이 미군 통신부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넓은 운동장은 전선 각지를 누비고 다닌 미군의 트럭들로 가득 차 있었고, 언제 다시 학교가 반환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경기고등학교는 1953년 10월이 되어서야 덕수국민학교 일부를 빌려 가교사를 차리고 전쟁 발발 이후 3여년 만에 서울에서 수업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남겨진 철모
학교에 남겨진 철모

이 철모는 육군병원 병동으로 사용되었던 서울재동초등학교에 군인들이 남겨둔 것입니다. 재동초 또한 전쟁 당시 군기관 시설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재동초 학생들은 대동상업고등학교의 교사(校舍) 일부를 빌려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 피난학교 천막교실

피난학교는 경북 의성군 장학사 박승직에 의해 창안되었는데, 1950년 9월 피난 중이던 박승직은 “교육은 한 때라도 중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의성군내 전 교직원과 학도들을 한데 모아 피난생활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951년 1.4후퇴 이후 임시수도였던 부산을 중심으로 피난학교들이 속속들이 생겨났습니다. 문교부(현재 교육부)는 1월 20일자 통첩으로 피난학생을 피난지 소재 각 학교에 등록 수용하여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러한 문교부의 임시 조치로 피난민이 다수 살고 있는 부산, 대구, 대전 등지에 피난학교가 개설되었습니다.

부산 초량동 천막교사
부산 초량동 산자락에 지어진 양정고등학교 천막교사
숭의여자고등학교 부산에서 피난학교 개설
숭의여자고등학교 부산에서 피난학교 개설
전시학생증
경기고등학교 전시학생증

1951년 9월 피난학교 등록 현황

피난학교는 당연히 제대로된 시설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노변, 산야, 해변을 전전하며 노천수업을 하기도 했으며 노천교실, 생벽돌교실, 천막교실 등 임시로 교실을 만들어 수업을 했습니다.

처음 개교한 장소는 보수공원의 수풀 속이었고,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송도의 언덕배기로 옮겨 천막교실을 마련하였다. 천막교실 안에는 책걸상을 설치할 형편이 안되어 단단하고 편편한 돌을 깔고 앚아 수업을 하기도 했으며, 겨울의 세찬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교사와 학생들이 진흙을 으깨어 토굴을 만들고 그 속에서 추위를 피하며 수업을 하기도 했다. - 서울고 50년사

부산 보수산에서의 보성여중·정신여학교 합동 노천수업
부산 보수산에서의 보성여중·정신여학교 합동 노천수업
부산 구덕산 가교사의 교무실
경기고등학교 부산 피난학교 교무실
부산 초량목장 가교사에서 수업 중인 숙명여자고등학교 학생들
부산 초량목장 가교사에서 수업 중인 숙명여자고등학교 학생들
천막교실에서의 수업
서울교동초 천막교실에서의 수업

교과서 있는 학생은 일부로, 교과서가 없는 학생은 없는 대로, 지리·수학·영어·미술 그리고 공민 등의 교과를 배우고자 교실로 몰려들었습니다. 학생들은 닭을 치고, 계란을 팔아서 학교의 살림살이를 돕기도 했습니다.

수업 이외에도 문예부, 체육부, 밴드부 등 다양한 동아리활동을 했고 전시회, 예술제,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도 하며, 소풍도 떠났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학교생활,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사그라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막막하고 고된 피난생활 속에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천막교사 교정 미술시간
경기여자고등학교 천막교사 교정에서의 미술시간
용산고등학교 음악반
용산고등학교 음악반
숙명여자고등학교 부산 가교사에서의 웅변대회
숙명여자고등학교 부산 가교사에서의 웅변대회

구술영상기록 - 피난학교 학생, 경기고 이규항

| 펜 대신 총, 교복 대신 군복 - 학도의용군

학도의용군은 6.25전쟁 시 학생의 신분으로 자진하여 참전하였던 의용병입니다. 어린 중학생 소년에서 장성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학도의용군의 이름으로 실전에 참여한 학도들은 6.25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모두 2만7700여 명에 이르렀고, 후방지역 또는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무려 2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중 상당수의 여학생들도 간호원으로 출정하였습니다.

학도병 참전기념 사진
부산 천막교실 앞에서 학도병 참전기념으로 촬영한 사진(1950, 서울고)

학도의용병들은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 편입되어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는 등 여러 격전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직접적인 전투 참가 외에도 경계근무지원, 탄약운반, 후방지역 선무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들고 자유수호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영웅들이었습니다.

용산고 학도의용군-금화전선에서
용산고 학도의용군-금화전선에서
용산고 호국동산에 세워진 순국학도탑
용산고 호국동산에 세워진 순국학도탑
용산고 순국학도탑 건립식
용산고 순국학도탑 건립식

구술영상기록 - 학도의용군, 용산고 박경선

| 관련 소장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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