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중부기록

어느덧 1학기가 지나고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이 다가왔습니다. 학생은 시험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평가받기에 학생에게 있어 시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1점 하나, 문제 하나에 울고 웃었던 학교 시험. 「월간 중부기록」 11월은 학교 시험의 변천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소장기록 한 장면

1953년 숙명여자중학교 입학 시험장 풍경
1953년 숙명여자중학교 입학 시험장 풍경
1953년 숙명여자중학교 입학 시험 신체검사장
1953년 숙명여자중학교 입학 시험 신체검사장

1970년대 이전까지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1953년 숙명여자중학교 입학 시험장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온 정신을 기울여서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입니다. 50분 안에 객관식 문제 40개를 풀고, 3일 동안 지능검사, 면접, 신체검사로 진행된 그 시절 중학교 입학시험. 초등학교 6학년생이 소화하기에는 꽤나 빡빡하고 고된 일정이었을 듯싶습니다.

|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입학시험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장면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장면

보통학교는 요즘의 초등학교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식민 지배 초기인 1910년대에 비해 1920년대부터 조선 사회에서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져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집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은행, 기업에 취업하거나 관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을 위한 학교 증설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학교의 수용인원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서 극심한 입학난을 야기하였습니다. 이는 곧 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만들었고 이때 처음 입시지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교동공립보통학교 수업 모습
1934년 교동공립보통학교 수업 모습

| ‘국6병’을 불러일으킨 60~70년대 중학교 입시제도

아직 중학교 의무교육이 도입되기 전, 60년대-70년대에는 지금의 ‘고3병’과 같은 ‘국6병’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이 중학교 입시로 인해 겪는 스트레스로 인한 병을 이르는 말인데요, 중학교 입시제도로 인해 1960년대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려는 과열된 경쟁구도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중학교 입시철이 되면 가출 사고와 자살사고도 잦았다고 합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은 지금의 ‘고3병’과 같은 ‘국6병’을 앓으며 입시지옥을 견뎌야했던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을 치열한 입시전쟁에 내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정부는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를 발표하였습니다. “앞으로 중학교 입시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문교부 장관의 전격적인 발표와 함께 중학교 입시제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입학 시험날[출처: KTV]

| 전쟁 중에 실시된 첫 국가연합고사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전투 지역에서 거주지를 옮겨 사는 중학교 입학 지원자들을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국가적 규모의 연합고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국가연합고사는 피난학생의 거주지 유동, 수업진도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종래의 학교관리제의 폐단이었던 정실입학·부정입학 및 관리상의 불공정성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1년 첫 도입되었습니다. 1951년 7월 31일을 기하여 전 지역에 걸쳐 실시하였는데, 전국 학교가 동일 출제로 시험을 치르고, 그 성적에 따라 학생이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고 선발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국가연합고사는 1954년까지 3년간 실시하다가 다시 학교관리의 자유출제제로 환원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천막교실 안에서의 시험 시간
6.25전쟁 당시 천막교실 안에서의 시험 시간
1951년 휘문중·고등학교 성적증명서
1951년 휘문중·고등학교 성적증명서
1952년 서울특별시대전종합중학교 성적통지표
1952년 서울특별시대전종합중학교 성적통지표

| 무즙파동 사건

무즙파동 당시 학부모 항의 사진
무즙파동 당시 학부모 항의 사진

무즙파동 사건은 1967년 12월 7일 실시된 서울시내 중학입시 출제 문제 가운데 자연과목 18번의 정답이 '디아스타제' 뿐만 아니라 '무즙'도 될 수 있다는 데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원래 출제위원회에서 마련한 정답은 ①번 '디아스타제'였으나, 당시 교과서에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었고, 문항의 질문 자체도 엿기름의 성분을 묻는 것이 아니고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을 물었기 때문에 ④번 ‘무즙’으로 선택한 학생의 학부모들이 항의를 하면서 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과열된 교육열 속에서 교육위원회의 불명확한 처리로 서울고등법원에 제소되어 1965년 3월 30일 원고 승소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38명(경기중 30명, 서울중 4명, 경복중3명, 경기여중 1명)이 추가 입학함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무즙파동 사건은 입시 출제방식에 대한 논의를 불러왔고, 1969학년도부터 무시험 추첨에 의한 중학교 입시제도가 서울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중학교 무시험 추첨 장면
중학교 무시험 추첨 장면

| 타임라인으로 보는 대학입시 변천사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 제도는 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및 학교생활기록부 상의 성적과 기타 요소를 바탕으로 선발하고 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제도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는데요, 광복 이후부터 1954년 첫 국가 차원의 대입 제도 도입,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학입시의 변천사를 살펴봅니다.

| 1980년대 국민학교 시험 문제 풀어보기

그렇다면 옛날 국민학교의 시험은 어땠을까요? 서울중부교육지원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울재동국민학교의 문제지를 여러분도 한번 풀어보세요.

초등학교 1학년

초등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 관련 소장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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